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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와 그 시대 (3)
申鉉夏  2020-08-06 12:41:01, 조회 : 250, 추천 : 35



  일본제국의 패망을 알리는 보도를 접한 한국인은 반신반의했다. 일본제국의 패망을 어렴풋이 감지하고는 있었으나, 이와 같은 모양으로
그 날이 오리라곤 상상조차 못했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멎은 듯한 뜻밖의 적막, 곧바로 사납게 불어 닥칠
동서 냉전의 폭풍 전야의 고요 속, 36 년간 일본제국에 학대를 받아 온 민중들은, 숨을 죽인 체 촉각만 곤두세우고 있었다. 16일자 신문에서 사태의
자초시종을 안 한국인은, 17일에 이르자, 즉석에서 만든
태극기와 가지각색의 문구가 쓰인 깃대를 앞세우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목이 터지라 “조선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했다.



  K’의 부락에서도 데모대가
조직되어 시장 바닥에 진을 친 가운데, 히노마루머리띄의 아래 반 쪽을 파랗게 칠한 태극기 머리띠를 두른
K’가 있었다. 장터에 운집한 남녀 군중의 누구나가 다, 멀지 않아 밀어 닥칠 역사의 쓰나미(해일)를 짐작도 못한 체, 그저 그냥 해방의 환희에 취해 있을 뿐이었다



  복학하여 졸업 준비에 골몰하던 때 보내온 모친의 편지로, K’의 씨가 틀림 없이 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조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다음 해, 이번에도 모친을 통해
K’의 2세가 탄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향리를 떠나 군부(郡部)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필자에게, K’로부터 격조 높은 한문조의
정중한 서신이 보내져 왔다. 그 후 ‘K’와는 몇 번인가
대면할 기회를 가졌었으나, 필자를 마치 자신의 스승처럼 예를 다해 대해 주었다. 또 계절에 따른 산채나 과일 등을 모친에게 가지고 온 그의 자당은, ‘선생님
덕분에 손자를 얻었다’고 고마워 하더란 것이었다. 태어난 ‘K2 세는 총명하며 건강하게 자라고, 성실 근면한 ‘K’덕분에 가세(家勢)
융성해졌다는 것이었다.



  1950 6 25일 미명, 북한 공산군이 북위
38
도선을 돌파하여 무력 침공을 해왔다. 미증유의 동족 상잔의 625 한국전쟁의 발발이다.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계획적인 공산군의 총공세에, 무방비였던 한국군은 작전상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으며, 전쟁 개시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이 적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바로 그때 서울에 있었던 필자는, 6 28일 새벽, 공산군의 포성을 등 뒤에 들으면서 기능이 마비된 시가지를
빠져 나와, 고향을 향해 남하하려고 한강 강변에 다다랐다. 수도
서울과 남쪽을 있는 유일한 다리이던 한강 인도교는, 27일 밤중에 격파되어 무참한 잔해를 들어내고 있었으며, 운집한 군중으로 강기슭은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한강 철교로부터
수백 미터 내려간 곳에서 나룻배를 발견하여, 초로인 선장에게 뱃삯의 배가 되는 지폐를 쥐어주고 강을
건넜다. 벌써 대통령 부()와 정부의 중추기관은 남쪽의 S 시에 옮겨졌으며, 난을 피해 남으로 내려가는 피난민은 장사(長蛇)와 같은 줄을 짓고 있었다.



  동서 냉전이 가져온 한국전쟁은, 한국군을 비롯하여 16 개국 군대와 북한 공산군, 거기에 중국 공산군을 더하여 제 3차 세계대전의 양상을 나타내, 우리나라를 전장(戰場)으로
해서 피투성이의 격전을 되풀이 했다. 당초 불리했던 전황 속에서도 우리들은, 이 전쟁으로 남북을 가르는 북위 38도선은 자연히 소멸되고, 국토와 민족이 통일된 독립국가의 성립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동서
양 진영의 흥정 끝에, 1953 7 27, 남북이 분단된 체로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60여년, 민족 통일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은 체 오늘에 이르고 있다. 3년에 걸친 전쟁은 종결했다고는 하나, 국토의 황폐는 극에 달해
눈을 가리고 싶었으며, 수백만에 이르는 전사상자(戰死傷者)와 행방불명인 자, 그리고 1천만을
헤아리는 남북이산가족을 낳았으며, 더하여 헤아릴 수 없는 수량의 물적 손해를 입었다.

 
전쟁 초기인 7
, 필자는 직장에 주둔하고 있던 H 사단 정훈부장 Y 대위의 간청으로, 그 사단의 정훈부(政訓部) 요원으로 현지 소집되었다.
거기서 주어진 임무는, 전황을 취재하여 “승리(勝利)”라는 등사판으로 찍은 보도물의 배포였다. 당시 한국군은, 되풀이 되는 작전상 후퇴로 인해, 전의를 상실하기 쉬운 상태로서, 부대의 편성도 정상 상태를 유지하기가 어려운 듯했다. UN 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제 자리를 잡을 때까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방위선을 사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현재 바닥에 떨어진 병사들의 전의를 앙양시켜, 어쩌면 멀어져
가는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되찾아, 반격의 그날이 오기까지 전의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취재진은 당연히 직접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으나, 임무 수행을 위해 탄환을 헤



쳐나가는 일이 적지 않았다. 생사를 가르는 전투원의 가혹한 임무에 비하면 편한 일이지만, 그래도
한여름에 군용 텐트가 아니면 민가의 농기구 창고가 병사(兵舍)이며, 게다가 언제 후퇴를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원지(原紙)의 밀이 녹아서 등사판의 홈이 막혀 질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는 중에, 8월 중순의 어느 날, 같은 사단에 선임하사관으로 참전하고 있던 제자의 전언으로, K’가 같은 사단의 헌병대에 소속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은 그와의 각별한 인연에,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았다.



  필자의 고향을 흐르는 한국에서 가장 긴 하천인 낙동강은, 한반도 전체의 약 6분의 1
해당하는 동남(영남) 지역을 둘러싸듯이 흘러, 마지막에는 부산국제공항 근처에 광대하며 비옥한 삼각주를 형성하며 남해에 흘러 들어가는, 우리들에게는 마치 어머니의 젖줄과 같은 하천이다. 한국전쟁 당초, 이 낙동강 방위선이 공산군에 의해 돌파되었다고 한다면, 대한민국은
그대로 남해 바다의 말(
) 부스러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낙동강을 따라 쳐진 방위선은, UN 군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마지노선이었다. 따라서 낙동강을 사이에 둔 피아의 공방은, 국가의
존망을 판가름하는 전투 바로 그것이었기에, 장래성이 있는 많은 젊은이가 목숨을 바치게 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동부전선에서 많은 희생자를 낸 학도병의 전공은, 한국
전사(戰史) 위에 영원히 빛나는 금자탑이리라.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라!’이것이 당시 UN 군에 내려진 지상명령이었다.



  9 15일 저녁 무렵, 내셔널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달라붙어 정보를 수집하고 있던 병사가, 마치
미친 사람처럼 큰 소리로 외쳤다. ‘맥아더 원수 휘하의 UN
해병대가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여, 목하 서울을 향해 진격 중이다’라는 것이다. 작업 중이던 모든 사람이 모두 일어서서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어느
샌가 서로 손을 잡고, 솟아오르는 뜨거운 눈물을 훔치면서 사나이 격정을 못 이겨 울었다. 라디오에서는 계속하여 우리 편의 유리한 전황이 보도되고, 낙동강
전선은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도 곁의 푸른 콩밭에 진을 친 사단 포병대가, 새로 보급된 105 밀리 야포(野砲) 수 십 문을 일렬로 포진해, 적진을 향해 더할 나위 없이 기세 좋게
쏴댔다. 전황이 불리해서 축적되었던 울분이 단번에 사라지고, 역사의
대전환을 예고하는 듯한 기운에 온몸이 긴장했다. 9 28, 꿈에서도 그리던 서울 탈환에 성공한 한국군 해병대가, 중앙청의 국기게양대에
태극기를 올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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